동작구

동작구

전체메뉴 닫기
본문 시작

인물

  • 홈
  • 분야별정보
  • 문화/관광/체육
  • 역사
  • 인물
공유하기

박팽년(朴彭年)

박팽년
시 대
조선 전기
활동분야
문신
본 관
순천(順天)
인수(仁?)
취금헌(醉琴軒)
대표관직
형조참판

충정(忠正)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으로 회덕 출신이다.
세종 때 그는 신숙주, 최항, 유성원, 이개, 하위지 등 유망한 젊은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도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단종 3년(1455)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단념하였다. 그는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있는 동안 세조에게 올리는 일체의 문서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고 다만 관직과 이름만 썼으나,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그리고 하위지·유응부·김질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다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박팽년은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세조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歸附)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하였으나, 그는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고, 세조를 칭할 때 반드시 ‘나으리’라 하고 ‘상감’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른 모의자들과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과 아들 헌·순·분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숙종 17년(1691)에 이르러 이들의 관직이 회복되었다. 박팽년은 영조 34년(1758)에 다시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그를 제향하는 사우로 회덕의 정절서원이 있었고,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홍주의 녹운서원, 연산의 충곡서원, 대구의 낙빈서원, 의성의 학산충렬사 등도 6신과 함께 그를 제향한 서원이다.
자료관리담당
문화정책과  / 02-820-9356
최종업데이트
2025년 0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