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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묘

신도비
구 분
문화유적
소재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로191 (노량진1동 155-1)
문화재지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전화번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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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희생된 70여명중 젊은 육신의 묘역이다.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1978년 정화해 사육신공원을 조성하였다.

한강에서 노량진쪽 큰길에서 오른쪽으로 비탈진길을 오르면 홍살문 안에 사당인 의절사(義節祠)가 있고, 그 앞뜰 좌우에 신도비(神道碑)인 유명조선국육신묘비(有名朝鮮國六臣墓碑)와 오석(鳥石)으로 다듬은 여섯 모의 사육신지묘비가 각각 서 있다.

봉분은 사당 뒤 불이문(不二門) 안에 모셔져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박씨지묘(朴氏之墓) • 유씨지묘(兪氏之墓) • 성씨지묘(成氏之墓) • 이씨 지묘(季氏之墓)라 새긴 표석이 있는 4개의 묘(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가 있었고. 그 뒤편으로 또 하나의 묘가 있어서 이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의 묘라고 전하여 왔다. 표석에는 보통 남자의 경우 씨명 (氏名 : 姓名)과 관작(官爵)이 기각(記刻)되고, 부인의 경우에는 씨(姓〕만을 기각하는 것이어서 사육신묘가 부인의 묘로 의심되기도 하였으나. 4개의 묘가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 부인의 것이 아님이 인정되었다.

이 사육신묘가 있는 한강 언덕 위는 지난날 사육신의 사형이 집행된 곳이라 전하기는 하나, 이들 중의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하였고, 유성원도 자기집에서 자인(自刃)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 앞에서 차열(車製)을 당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줄 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겨우 살아 대를 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들들이 모두 교형 (絞刑)을 당하였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되어 멍에를 걸머졌었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이 있었을지라도 국가적인 기휘(忌講)를 받은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중히 장사지낼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 부터였다. 숙종 5년(1679)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육신묘를 봉식(封植)하였고, 1691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사장 (紫染沙場)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곧 이어 사육신을 숭장(崇契)하였다.
한편. 1681년에는 사육신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愁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때 박팽년의 7대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의 존승을 받게 되었다.
그뒤 정조 6년(1782)에 이르러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는데,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超銳松)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원래 신도비는 정조 6년 건립 당시부터 봉분 아래에 세워져 있었고 육각비도 봉분 뒤 산마루에 세워져 있었으나, 성역화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신도비 비문에 “성삼문 등 6충신이 사형을 당한 당시의 서울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체를 매장할 겨를 조차 없었으나 다행히 생육신(生穴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밤중에 남 몰래 이 산에 시체를 모시었으니 창망 중에 시체가 제대로 챙겨져서 모셔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적혀 있다.

원래 단종의 복위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은 사육신 이외에도 권자신(權自懷) • 김문기(金文起) 등 70여 인에 달한다. 그런데 이 많은 희생자들 가운데서 사육신만 꼽는 것은 당시의 절의파(節義派)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쓴〈사육신전 死六臣傳〉 때문이다.

1977년 경 서울시가 사육신묘역을 성역화하면서 종래에 없었던 하위지와 유성원의 묘를 새로 마련하여 가묘를 쓰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백촌(白村)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주장은 남효온이〈사육신전〉을 쓸 때 백촌 김문기와 유응부를 바꿔 기술했기 때문에 김문기가 사육신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을 받은 서울시는 그 내용을 문교부에 질의하게 되었고 국사 편찬위원회에서는,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의 6신이 세조조에 가려진 6신이라고 판정되며, 김문기를 현창(顯彰)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통고를 받은 유씨(兪氏)문중과 일부학계에서는 크게 반발했다.
결국, 이 문제는 사육신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유응부의 묘도 종전대로 모시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해서 사육신묘는 7신의 묘가 되었다. 또한 민절서원에도 여섯 분이 아닌 일곱 분의 위패를 모시게 된 것이다.

사육신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설치된 민절서원(愁節書院)은 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5년 서울시가 6각(角)의 육신묘비를 세웠다. 또, 의절사와 불이문은 모두 1978년에 사육신묘역의 정화사업 때 세워진 것이다.

약도

교통정보
  • 지하철 : 1•9호선 노량진역(2, 8번출구), 9호선 노들역(1번출구)
  • 일반버스 : 사육신묘 하차 (노량진로 방면 모든차량) 150, 152, 360, 363, 500, 504, 605, 640, 751, 4511, 5011, 5516 등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로191 (노량진1동 155-1)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로191 (노량진1동 155-1)
  • 신도비 신도비
  • 사육신묘 사육신묘
  • 민절서원 민절서원
  • 사육신묘지 입구 사육신묘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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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2024년 07월 16일